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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람책

"전주사람책은 전주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고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타악기 연주자 '김은수' 인터뷰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20-09-14

  • 전주가 '예향의 도시'라는 말은 익히 들어보셨을 겁니다. 전주는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예술 문화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지역이죠. 전주에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전주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한 음악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전주 문화예술의 큰 포부를 실현하고 있는 타악기 연주자 김은수 씨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Q1.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1. 안녕하세요. 전주에서 활동하는 타악기 연주자이자, 문화예술교육 콘텐츠로 창업을 준비하는 김은수입니다. 지금은 실장으로 물어났지만, 2020년 3월 초에 '두드림 공동체 타키' 대표직을 맡았었고요. '지화자' 팀에서는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지화자팀은 지역예술·청년예술·사회혁신 세 가지 축을 가지고 지역 예술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팀이죠. '북모닝'이라는 예술가 독서모임도 하고 있습니다.


    Q2.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A2.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왔어요.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하셨는데,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 깊은 분이셨어요. 6~7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전주에서 하는 공연과 전시회, 오페라 등을 자주 관람했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 장영주 공연이에요. 이때는 제가 초등학생일 땐데요. 제가 보통 어머니랑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면 거의 졸기 일수였는데, 근데 그때 비탈리의 〈샤콘느〉라는 곡을 듣는 순간 제 안에 마법이 일어나는 것 같았어요. 압도되어 버린 거죠. 바이올린의 음압이 저를 찍어 누르는 것 같았어요.

    Q3. 타악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언제였나요?

    A3.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많이 만져보았어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클라리넷도 7년 정도 했네요. 합창단도 오래 했어요. 예술중학교를 갈 수도 있었지만 전주중앙중학교로 갔죠. 어머니가 원치 않으셨어요. 드럼을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이때 드럼을 만나고 처음 밴드를 하게 되었죠. 신흥고등학교에서도 밴드를 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용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드럼을 깊이 배우기 시작했고, 백제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진학했어요.


    Q4. 재즈 드럼을 전공하셨더라고요. 전공으로 선택한 계기가 궁금해요.

    A4. 처음부터 재즈를 전공하려는 생각이 있었어요. 미국의 전통 음악이자 대중음악의 근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제가 음악을 공부할 때 형들 사이에서는 일단 락에서 정점을 찍고 재즈로 넘어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럼 재즈가 끝인 건가? 내가 끝을 해 버리면 되겠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재즈를 해 보니, 락 이전에 재즈부터 시작하는 게 대중음악사의 흐름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제가 음악을 하던 시기에는 락을 먼저 접하고 재즈를 입문하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뮤즈나 린킨 파크, 라디오헤드 등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출발의 차이인 거죠. 미국을 중심으로 보면 재즈가 원류겠지만 영국을 중심으로 본다면 밴드 음악이 첫째죠.

    Q5. 서울살이는 어떠셨나요?

    A5. 서울은 두 번 갔어요. 처음은 드럼 입시 때문에 두 번째는 연주자로 올라갔죠. ‘솔라’라는 홍대 놀이터 앞에 있는 재즈클럽에서 호스트 드러머를 했었어요. 일주일에 5일 정도 연주를 했죠. 평일에 2시간 연주하고 5,000원 받았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욕할 수 없었던 게 일단 무대가 절실했고, 공연을 데리고 다녀주신 점도 있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정당한 돈을 받을 수 없는 구조였어요. 그곳에서 8개월 일했던 것 같아요. 한 달에 50만 원 정도 벌었던 거 같아요. 드러머로 연주를 하다가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그런 식이었죠. 그러다 문득 ‘나는 돈이 없으면 음악가로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입영통지서가 날라온 거죠. 10월에 입대 예정이었지만, 당겨서 8월에 입영했어요. 그때 이미 제 생각은 '나는 다시는 음악 안 할 거야. 이렇게 배고프게 살 수 없어'였어요.

    Q6. 예술가로 살면 현실적으로 힘든 순간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A6. 어느 날 저희 큰 매형이 물어봤었죠. '넌 10년 뒤에 뭐가 돼 있을 것 같니?' 저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드러머로 잘 되면 세션맨, 아니면 교수, 학원 원장인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 거예요. 이미 저보다 잘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어떤 친구는 유학도 가고 서울예대 편입도 하고, 제 친구 중에 색소폰을 정말 잘한 친구는 농사를 짓고, 다른 친구는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Q7. 인생에 터닝포인트는 언제였나요?

    A7. 군대에서요. 음악을 그만둘 결심으로 일반 보병으로 갔어요. 수능을 다시 준비해서 다시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터닝포인트가 왔죠. 군대에는 전우조가 있어요. 세 명이서 같이 다니는데 그 전우조에 중앙대학교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한 동생이 있었어요. 얘는 이미 군악대로 결정된 친구예요. 그 친구가 ‘형, 군악대 모집하니까 가보자’고 꼬시더라고요. 그래서 군악대로 차출이 되었죠.

    군악대에 가서도 7개월 동안은 계속 수능 공부를 했어요. 나는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좌절감이 강했어요. 그런데 선임들이 편하게 해주고 연습할 시간도 주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드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새롭게 결심한 이후부터는 내가 드럼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현명해져야겠구나. 그래서 심리학 경영학 등 다양한 책을 읽었어요.

    Q8. 제대 이후 전주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A8. 25살 5월에 제대하고 전주로 왔죠. '쟈스'라는 학원에서 레슨을 시작했고, 저녁에는 칵테일 펍에서 일을 했어요. 그때 형들이랑 공연도 하고 음반도 준비하고 퓨전국악 ‘소리애’라는 팀을 소개받아서 지금까지도 함께 활동하고 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국악도 접하게 되었어요.

    확실히 전주에서는 국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어요. 어릴 적부터 수많은 창극이나 사물놀이, 국악들을 접했고 저한테 편한 장르였죠. 그때 클래식 크로스오버 팀도 하고 모든 장르를 다 다뤄보는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었어요.

    Q9. 지역 예술가에 대한 비전을 언제부터 만들어 나갔나요?

    A9. 2018년 4월 두드림 공동체 ‘타키’부터인 거 같아요. ‘왜 실용음악 전공생들은 졸업한 이후에 학원 강사밖에 할 수 없을까?’란 고민을 했고, ‘그럼 전공생들도 신나고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단체를 한 번 만들어보자’라고 결심했죠. 시작은 맥줏집에서 형들과 이야기하면서 였어요. 제 고민을 이야기했고, 형들은 ‘그럼 은수 네가 해 봐’라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진짜 내가 해볼까?’한 거죠. 이런 취지가 예술가 전체로 확대된 것은 2019년이었고요.

    다양한 팀을 하면서 다양한 팀원들 이야기를 들었어요. 클래식, 국악, 대중음악. 그러면서 구체화됐어요. 그러면서 예술교육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퍼레이드 팀을 만들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게 2014년이죠.

    전주에서 팀을 결성해서 퍼레이드를 했고 후원도 받아서 젬배를 샀어요. 젬배를 싣고 다니면서 완주와 전주에서 교육을 했죠. 이런 전반적인 ‘타키’ 활동이 확산되었고 거기서 얻은 경험들을 ‘지화자’로 옮겨 간 거예요. 이런 작업을 지속하던 중에 이런 생각을 혼자서만 한다고 소용 있는 게 아니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여야겠다고 해서 만든 모임이 ‘북모닝’입니다. 현재 북모닝, 지화자, 쥬니온 안에서의 활동을 앞의 생각들을 가지고 이어가고 있어요.

    Q11. 지역 예술가와 함께 만들고 싶은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A11.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응용하자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죠. 지역에 응용하자면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라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은 자기 지역에서 나온 밴드에 대한 자부심이 커요.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더블린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지역은 리버풀이나 맨체스터 등지의 공업지대가 유명한 밴드를 배출했어요. 어떤 밴드는 구성원의 출신지가 섞여있어서 웨일즈 밴드인지 스코틀랜드 밴드인지 서로 논쟁을 벌일 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죠. 팬덤 문화가 굉장히 강한 거예요.

    제가 원하는 것도 그런 거죠. 지역을 기점으로 예술가들이 육성이 되고, 서울이나 전 세계로 활동을 확장하면서 지역민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실제로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보다 전주가 인구수도 많고 악기도 많아요. 즉 태동할 수 있는 소스는 준비되어 있다고 봐요. 예술가의 계몽과 시스템의 구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나아간다면 가능할 거라 봅니다.

    written by 설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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