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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람책

"전주사람책은 전주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고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전주 재즈 피아니스트 김성수 인터뷰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20-09-07

  • 피아노’와 ‘CRPS’는 김성수를 표현하는 키워드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담기로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글로 옮기는 데까지 많은 고민과 시간이 걸렸는데요. 지나간 과거의 아픔을 들추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아물 시간 없이 진행되는 고통을 기록한다는 것은 참 복잡한 일인 거 같습니다. 그러나 김성수 피아니스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되새기며 그의 이야기를 담아 전해 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진짜 가난하고 빽도 없던 저 친구가 저렇게 성공할 수 있구나~’라는 이야기를요. 그 이야기가 널리 퍼져서 단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길 바라거든요. 희망을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절실할 때, 저는 그 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 피아니스트 김성수 -

    Q1. 독립하신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어요. 언제 독립하시게 되었나요?

    A1. 제가 다리가 많이 아프기 시작한 해에 나와서 살기 시작했어요. 처음 발병한 것은 2016년 12월부터였어요. 근데 점점 더 심해지고 안 좋아지니깐 어느 순간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되더라고요.

    예민해지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많이 아플수록 예민해지기 쉽더라고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예민함을 표출하게 되면, 표출한 당사자가 더 상처를 받더라고요. 저는 상처받기도, 상처 주기도 싫어서 최대한 안 아픈 척, 티를 안 내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아픈 모습 안 보여주려고 점점 늦게 들어가다가 그냥 독립하게 되었죠.

    Q2. 유년 시절은 어떠셨나요?

    A2.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생 때 엄청 가난해졌어요. 아버지의 10중 추돌 교통사고가 있어났고, 이후에 집이 풍비박산이 났었죠. 아버지는 대학병원에 3년 이상을 입원하시고, 어머니도 교통사고 수습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런 시기에 검은 정장 아저씨들이 들어와서 집에 빨간 딱지 붙이고 했어요. 진짜 무서웠죠. 초등학교 안에서 제 뒷덜미를 잡기도 했으니까요. 다른 애들한테는 그게 신기하잖아요.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 그래서 한 400명 정도가 다 둘러싸서 구경하더라고요.

    19살에 선교활동으로 필리핀에 갔다고 돌아왔어요. 전주역에 딱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이 흩어졌어요. 저는 시급 1,800원 아르바이트를 바로 시작했어요. 그땐 꿈이 되게 소소했어요. 붕어빵 만 원어치 사 먹는 거, 게임방에서 짜장면 시켜 먹는 게 꿈이었어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꿈을 이뤘죠.

    Q3. 피아노는 어떻게 다시 하시게 된 건가요?

    A3. 피아노는 5살 때부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는 잘 살았으니까 집에 피아노도 있었고, 학원도 다녔어요. 중간중간에 교회에서 CCM으로 활동하면서 피아노를 계속 연습했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5살쯤이었어요. 그때 TV에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엄마, 나 저 사람한테 피아노 배우고 싶어”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아들, 배우면 되지” 하시는 거예요. 그냥 툭. 근데 그게 확 꽂힌 거예요. 그때 진짜 현실화 시켜 보자는 결심을 하고, 수소문해서 선생님 연락처를 알아냈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전화로 "전주 사는 누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선생님한테 정말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 그러더니 처음엔 되게 떨떠름하셨어요. 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한참 연락이 없더라고요. 그냥 안 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화가 나는 거예요. 미쳤다고 생각하고 한 번 더 전화를 드렸죠. 정말 배우고 싶다, 안 되는 거냐. 좀 칭얼거렸어요.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그냥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한참 말이 없으셨죠. 조금 있다 하시는 말씀이 그렇다고 레슨비 깎을 생각이 없다고 하셨어요. 당시 그 선생님 한 타임 레슨비가 일반 강사급 한 달 레슨비 정도였거든요. 저는 그래도 좋으니까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 관계가 되었어요.

    Q4. 전주에서 음악 활동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A4. 2012년이었어요. 우연히 밴드 '바람처럼'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그 팀 형님들이 전주에서 재즈를 제일 잘하는 형들이에요. 시기가 맞았던 거 같아요. 밴드 '바람처럼'에서 남자 재즈 피아니스트를 구하던 중에 제가 함께할 수 있었어요. 그때 생각하면 제 실력이 엄청 부족했는데, 형들이 저를 잘 이끌어줘서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2012년 같은 해에 카페 로이(Cafe Roy)에서 로이 형도 만나게 되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공연을 하게 된 거죠. 세월호 사건 때 빼고는 쉰 적이 없어요. 세월호 때는 도저히 공연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패닉이 있었죠. 그래서 그때 로이 형이랑 같이 주최해서 〈세월〉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A5. 당연히 밴드 활동을 계속했고요. 피아노 레슨을 되게 빨리 시작했어요. 어린 학생들, 대학생, 성인들, 두루 했었어요. 그렇게 레슨만 하다가 학원 메인강사 제안이 왔었죠. 원래 5명 상담했었는데, 나중에는 11명이 되고, 4~50명이 모이기도 했었죠.

    그러다 2018년부터 모든 레슨을 다 접었어요. 본업인 음악 활동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많은 고민을 했어요. 생계에 대한 고민, 병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내가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 그래서 뮤지션에 전념하기로 했죠. 최근엔 출강도 하게 됐네요. 조금씩 무언가를 해나가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Q5. 김성수 피아니스트를 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실까요?

    A5. 누군가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진짜 중요한 거 같아요. 문득 든 생각 하나로 다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첫걸음이죠. 저는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진짜 가난하고 아무 빽도 없는 저 친구가 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어떤 사람에게 전달되는 거죠. 저는 그런 게 없었어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소중한 조언을 해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딱 한 사람. 어머니가 저에게 커다란 멘토죠.

    제가 〈청춘마이크〉나 〈신진예술가〉 등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있어요. 누군가에겐 인생을 바꿀만한 존재이자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 꿈은 ‘상생’이에요. 제가 할 수 없는 영역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뮤지션들과 셰어하면서 공연을 꾸미는 편이에요. 올해도 저는 전업 뮤지션으로서 좋은 음악 활동을 하는 게 목표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written by 설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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